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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즉위와 그 배경
조선의 역사에서 광해군의 즉위는 많은 정치적 갈등과 개인적 드라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광해군의 어머니, 선조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즉위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광해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그를 낳은 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선조의 정실부인인 의인 왕우가 광해와 임해군을 친자식처럼 키웠습니다. 의인 왕우는 광해가 세자로 책봉될 때 직접 양자로 들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상 그녀가 광해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의인 왕우마저 사망하게 되면서, 광해는 든든한 후견인을 잃고 더욱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선조는 그를 멸시하고 핍박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광해는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조의 정치적 결정과 왕비 간택
어느 날, 신하들이 선조에게 명나라의 세자책봉을 다시 청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묻자, 선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전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중전의 자리가 빈 지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선조는 즉각 새 신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 왕우가 죽은 지 2년 만에 임광 김씨가 새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 당시 선조는 51세였고, 임광 김씨는 19살로 광해와는 큰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비가 사망할 경우 일반적으로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승격시켰지만, 선조는 새로운 여인을 왕비로 들였습니다.
선조의 방탕한 생활과 정치적 비판
선조는 어린 왕비와의 방탕한 성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선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그는 정력에 좋은 탕약을 매일 지어 먹으며, 경연에도 대충 나가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신하들은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국모의 자리가 비었다면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올리면 될 것이지, 왜 굳이 새 왕비를 간택하는가?"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선조의 이러한 행동은 사실상 그가 어린 신부와 아들을 낳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태어난다면 광해는 왕위에서 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광 김씨는 첫째와 둘째 아이를 모두 잃었고, 결국 세 번째 아이인 영창대군을 낳게 됩니다.
영창대군의 출생과 정치적 동향
영창대군의 출생 이후, 선조는 그를 총애하게 되었고, 임광 김씨는 사적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신하들은 영창대군 쪽에 줄을 대기 시작합니다. 신진 라인의 대표적 인물은 유경이었습니다.
유경은 1550년 출생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종구품 참봉을 지낸 적이 있는 고위 관료 집안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572년 문과에 급지하여, 임진왜란 중에는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유경은 왕의 의중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능력이 뛰어나,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고속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정권의 분열과 유경의 전략
전쟁 이후 북인 세력은 두 갈래로 나뉘게 되며, 유경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는 선조의 마음이 자신 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영창이 성장할 때까지 선조가 버텨주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광해의 입지가 굉장히 견고해졌습니다.
광해는 이미 세자로 책봉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전장을 누비며 나라를 세운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영창을 세자로 책봉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광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선조의 병세와 정치적 혼란
선조는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왕위를 넘기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영창대군은 겨우 두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영창대군의 후계 지명이 어렵다고 판단하며, 유경과 좌우 이정에게만 이 사실을 전합니다.
하지만 중전이 태세를 전환하며, "성상의 뜻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유경은 중전에게 반대 의사를 밝히며, "신들이 죽는 안이 있어도 그 명은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선조는 기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선조의 죽음과 광해의 즉위
선조는 유배 명령을 내린 지 이틀 뒤, 찹쌀밥을 먹은 후 갑작스럽게 위독해지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신하들은 즉시 광해에게 달려가 즉위식을 올리라고 간청합니다. 광해는 선조의 죽음 다음 날 왕위에 오르게 되며, 그는 조선 제 18대왕 광해군이 됩니다.
이로써 광해군의 즉위는 정치적 음모와 개인적 갈등으로 가득한 복잡한 역사의 한 장을 마무리합니다. 그의 통치가 조선 역사에 미친 영향은 앞으로의 글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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