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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조선 최대의 도시가 인구 9만 지방 소도시로 쇠퇴한 이유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야기

by 작은비움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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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YGWHc6QUUkE&t=29s

 

현재 인구 9만의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과거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사람과 물자가 물리던 조선 시대 최고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인구 순위로 도시 규모를 따진다면 약 140위 되는 도시입니다. 심지어 시의 기준인 10만 인구도 안 되는 도시로 전락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경상도의 지명 중 상자의 유래가 되는 상주 시입니다.

과거 상주시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상주시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경상도에 감형이 설치되어 있던 도시였습니다. 가영이랑 지금의 도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 낙양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가장 중요한 강인 낙동강의 유래에 영향을 준 도시라는 점만 생각해도 과거 상주시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상주시 쇠퇴의 이유

이토록 위상이 높았던 상주시는 현재 왜 세태 있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교통 수단의 변화 때문입니다. 상주시가 과거 위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고, 수운을 이용한 물자나 조세의 흐름의 중심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상주시의 지리적 특성에 대해 택리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상주는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 조과 가까워 충청도,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동강에 가까워 김해 동네와 통하기 쉽다. 운반하는 말과 짐을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 편리한 까닭이다. 택리지의 서술된 것처럼 과거 상주시는 경상도 중심에서 사통팔달 도시였습니다.

상주 시가 교통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경부선을 조령 중령이 아닌 추풍령으로 선택함으로써 상주시가 아닌 구미천시로 놓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추풍령은 사람과 마차가 다니기는 위험했지만 해발 고도가 낮아 철도를 건설하기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철도 건설 이후 고속도로 마저 경부선과 비슷한 경로로 건설되면서 김천시 구미를 거쳐 대구 광역시 부산 광역시로 연결되었습니다.

교통의 변화가 가져온 쇠퇴

실제로 김천시는 경부선 개통 이후로 상주 시를 대신하여 경상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을 이용해 물자를 운송하던 과거의 운송 수단도 철도와 고속도로가 신 하여 급격하게 쇠락하였습니다. 상주시는 교통수단의 변화로 인해 도시가 가진 지리적 경쟁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상주시가 쇠퇴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산업의 변화입니다. 상주시는 예로부터 300의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상주의 특산물이 쌀 모카 누에고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주시는 서울 면적에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넓은 평야를 가졌습니다. 조선시대 쌀 생산량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으로, 현재도 쌀 생산량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많은 도시입니다.

산업화의 영향

과거 많은 쌀을 생산하는 도시였던 만큼 많은 일손이 필요하였고,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1960년 이후 대한민국은 산업화, 공업화를 중점적으로 육성하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대구시, 구미시가 공업 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1차 산업이 중심이었던 상주시의 인구는 주변 공업도시로 급격하게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60년대까지 상주시의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전국 10대 정도 되는 도시 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약 40년간 20만이 넘는 인구가 유출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호구 청소라는 책에 따르면 상주시의 인구는 약 7만 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230년 간 전국의 인구가 10배 이상 증가하는 사이 상주시의 인구는 약 2만 명 정도 늘어난 것입니다.

다른 쇠퇴한 도시들

상주시만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급격하게 쇠퇴한 또 다른 도시가 있습니다. 상주시와 함께 경상도의 경자의 유래가 되었던 도시, 바로 경주 시입니다.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도시였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개성, 평양과 함께 3대 도시에 포함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근대 이전까지도 경주는 대한민국에서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경주시 옛 이름인 서라벌은 수도라는 의미로 통용되어 서울의 지명에 영향을 줄 만큼 대한민국 역사에 상징적인 도시였습니다.

과거에 찬란했던 역사는 현재 도시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유적들은 중고 검을 육성할 수 없는 도시로 만들었고 1960년대 포항시, 울산 광역시가 공업도시로 육성될 때 경주시는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모을 목적으로 관광도시로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경주시의 인구는 약 30만 명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포항, 울산 광역시, 부산 광역시 등으로 급속하게 인구가 유출되었고, 그 결과 40년간 인구와 도시 성장이 멈춰 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공주 시와 나주 시

충청남도 공주 시도 과거 충청도 감영이 소재할 정도로 조선시대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강을 이용한 수훈을 중심으로 전라도, 충청도와 한양을 이어주는 물류 이동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공주 시도 철도와 자동차의 발전으로 공주시가 가진 교통상 지리적 이점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전라도의 어원 중 라자에 해당하는 나주 시도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도시 중 하나입니다. 나주시 역시 수훈이 물류의 중심이던 시절 전라도 최대의 내륙 한구인 영상포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현재와 미래의 도시

충청북도 충주시 역시 앞선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수운의 영향이 감소하면서 쇠퇴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충주시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각지에서 생산되는 물자나 조세가 일단 충주시에 모여들면 수운을 통해 한양으로 이동하는 것이 조선시대 물류의 흐름이었습니다.

앞선 도시들은 대한민국이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변화할 때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도시들입니다. 비옥한 토지와 넓은 강을 이용한 교통의 이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반면 조선 시대까지 도시로서 명성이 아주 미약했지만 산업의 변화로 급격하게 성장한 도시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부산입니다. 사실 부산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까지 들어 보기조차 힘든 지명이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과 자본이 이동해온 곳이 부산이었습니다.

부산과 울산의 성장

부산은 주변 농촌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섬유, 신발, 합판 등과 같은 노동 집약적 경공업을 위주로 급속한 도시 성장을 하였습니다. 부산의 수출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2년에는 최고 29%에 달했습니다. 1970년대 부산의 인구 증가율은 매 10%에 육박하였습니다.

대전광역시는 대전역이 건설되기 전 원래 공주군 산내면 대전 리에 불과하였습니다. 대전광역시는 1904년 대전 리의 경부선 대전역이 설치되면서 도시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경부선 대전역 설치 2년 만에 대전역을 중심으로 회덕군이 신설되었고, 1914년에는 회덕군 진장군 유성면을 통합하면서 대전군이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도시의 균형 있는 발전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은 1990년대부터 2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 결과는 공업도시의 인구를 유출시키고 새로운 도시가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3차 산업인 지식, 정보, 통신, 금융 서비스 산업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매우 집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리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도시가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싶다면 도시의 균형 있는 발전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 이유로 급속한 성장을 했다면 그 한 가지 이점이 사라지는 순간 급격한 추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상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도시 연구소입니다. 만족하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다음 도시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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