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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갈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꿈은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던 시절부터 현재의 의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화를 늦추고 죽음을 막기 위한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이른 죽음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죽음도 두려워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인간은 죽음을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많은 생명체는 죽음 앞에서 저항하지 않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포유류나 조류와 같은 동물들도 죽음에 저항하지만, 인간만큼 그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해하지는 않습니다. 동물들은 현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 마지막 순간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부정하려는 인간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부정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천국이라는 사후 세계를 믿으며, 죽음을 진정한 끝이 아닌 더 완전하고 영원한 삶의 시작으로 여깁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윤회를 통해 또 다른 삶의 지속을 꿈꿉니다. 유교에서는 조상의 넋을 기리며 죽음을 완전한 끝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와 죽음의 인식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이제는 죽음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정말로 완전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대 과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물질들이 잠시 모여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물질을 묶어 두는 힘이 사라지면, 우리는 이 우주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영혼도 다음 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대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상상해도, 진짜 죽음은 아닙니다. 진짜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가치 평가
하지만 철학자 하인의 홀맨은 '왜 죽음인가'라는 그의 논문에서 죽음이 나쁘다고 가치 평가하는 철학적 입장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를 펼치며 살아가는데, 죽음은 그 프로젝트를 갑자기 중단시킵니다. 이는 현재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죽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나은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죽음을 미루고 싶다는 욕망을 느낍니다. 만약 병에 걸려 1년 후 죽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 죽음을 더 뒤로 미루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미루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죽음을 계속 미뤄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과연 그런 영생 속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영생의 상상
가령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한 채로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럴 때 인간은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홀맨은 아무리 건강하게 살더라도 영원히 사는 인간은 결국 끔찍한 불행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따르면, 우주는 언젠가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장소가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구라는 우주 안에서 아주 작은 점에 맞게 진화를 해왔습니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에너지를 잃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은 기술과 생물학적 강화를 통해 생존 능력을 키운다고 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불안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빅크런치라는 사건을 통해 급속도로 수축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학적 예측을 고려할 때, 인간이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우주의 환경이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홀맨은 영원히 사는 인간은 항상 그 언젠가 닥칠 무서운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모든 고통을 없애는 기술을 만들어낸다면, 인간은 행복할까요? 우주가 얼어붙거나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이 생긴다면, 영원히 멀쩡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홀맨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가치의 대조
인간이 느끼는 가치는 고통이나 불행과 대비되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기분이 좋고, 피곤할 때 잠을 자면 행복한 것입니다. 만약 모든 고통과 불행을 없애버리면, 인간은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지루하고 공허한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에서 누리는 삶이 찰나의 순간에 주어진 행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행운에 맞게 형성된 인간적 가치의 기준에서 생각해 보면, 영원한 삶은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조건이 인간의 영생과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긍정적 기능
홀맨은 죽음이 없으면 삶이 형태를 잃어버린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이라는 끝지점이 있기 때문에 삶은 하나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며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결말이 나지 않는 영화는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미래가 무한정 열려 있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는 불명확해질 것입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현재 주어진 기회를 유의미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회가 앞으로도 무한히 펼쳐져 있다면, 각각의 기회는 사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모든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현재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의문
많은 종교가 영생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영원히 사는 것이 행복하기 어렵다면, 사람들은 왜 그토록 영생을 열망할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원한 삶을 상상하기보다는, 또 다른 유한한 삶을 상상하는 것일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상상을 할 때, 우리는 보통 지금과 비슷한 조건에서 펼쳐질 또 다른 삶을 떠올립니다. 그 삶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대략적으로 가정하긴 하지만, 그 끝나지 않는 삶에 대해 깊이 추적하며 상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의 유한한 삶과 대비해 죽음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 삶이 좋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론
영원한 삶은 탈출구가 없는 다친 공간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상을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은 숨통을 트는 하나의 창구로서 작동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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