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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사 미스테리 : 고려 시대 474년간 있었던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고려의 미스터리 정리

by 작은비움 2024.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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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Dj26aoU-Pe0

 

고려사는 삼국 시대보다 자료가 많지만, 여전히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600년 전 역사이기에 자료가 완벽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선 시대와 비교했을 때, 자료의 양이 부족하고, 야사도 적어 후대 사람들이 해석하거나 추론해야 하는 고려 시대의 밝혀지지 않은 역사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고려 시대의 미스테리들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왕건과 대광현의 망명 시기

태조 왕건이 멸망한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받아준 시점은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해는 926년에 멸망했습니다. 발해 멸망 후 대광현이 발해 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해 왔고, 태조 왕건은 이들을 받아줍니다. 그러나 대광현의 망명 시기와 관련해서는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는 934년으로, 《고려사절요》는 925년으로, 《동국통감》은 926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멸망 전인지, 멸망 시점인지, 멸망 후 몇 년 후인지에 따라 대광현의 행보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 시점이 중요합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견훤의 마지막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견훤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견훤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자신이 건국한 후백제의 수도 전주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견훤은 전주와 가까운 충청남도 논산에서 만년을 보냈고, 논산에 있는 견훤 왕릉도 견훤 왕릉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훈유십조 제8조의 해석

태조 왕건의 훈유십조 가운데 제8조에서는 태조 왕건이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 바깥에 사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으니 국가 요직에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외국 망명 집단도 받아줄 정도로 통합을 중요시했던 태조 왕건이 왜 특정 지역을 차별했는지 의문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궁예가 왕건 등 패서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청주 지역 세력들을 등용한 것에 대한 경계로 보고 있습니다.

 

왕규의 난과 혜종의 죽음

혜종 제위 말기에 일어난 왕규의 난과 관련해서도 의문이 전해집니다. 외가쪽 힘이 약했던 혜종은 외가쪽 힘이 강했던 두 이복 동생들에게 압박을 받았고, 태조 왕건은 혜종의 뒤를 왕규와 박수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왕규와 혜종 사이가 멀어져 왕규가 혜종을 죽이려고 했고, 혜종이 암살되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이후 왕규의 난이 일어나고 박수희가 살해되며, 혜종의 두 이복 동생이 각각 3대왕 정종과 4대왕 광종으로 등극했습니다.

고려 중앙군의 운영 방식

고려의 궁궐과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인 2군 6위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상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2군 6위 소속 군인이 직업 군인으로서 군복무의 대가로 군인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평상시에는 농사 등 생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정기적으로 군사 훈련을 받고 전시에 군인으로 동원되었다는 부병제론입니다. 두 가지 방식이 적절히 섞여서 운영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소순영의 병력

993년 거란족의 1차 침입 당시 소순영이 끌고 온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소순영은 80만 대군을 끌고 왔다고 했지만, 이는 당시 고려에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서희는 절대 80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외교 단판에 나섰습니다. 정확한 병력 규모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천추태후의 정사 개입 여부

천추태후가 내연남 김치양을 비선실세로 두고 자기 아들 목종을 꼭두각시로 만들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종이 주체적으로 여러 정책을 펼친 기록이 있으며, 김치양 일파가 득세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김치양이 정치에 어디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강조의 정변과 강감찬의 행적

강조의 정변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들이 많습니다. 첫째, 목종은 강조에 뭘 믿고 구원을 요청했을까요? 둘째, 강조는 목종의 부름에 개경으로 내려갔다가 김치양 부하에게 속아 서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갔다가 망설였습니다. 셋째, 강조는 언제부터 목종을 죽이려는 생각을 품었을까요? 넷째, 강조가 내려오는 것을 알고 있던 김치양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강감찬의 초기 행적

강감찬은 개국공신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 합격했음에도 20년 가까이 지방 관직을 전전했습니다. 강조의 정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중앙 요직에 진출했는데, 강조와 어떤 연이 있었는지, 아니면 운이 좋아 발탁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강감찬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흥료국과 발해 부흥 운동

발해 멸망 후 요동 반도에 발해 왕실 대씨가 건국한 흥료국이 있었습니다. 흥료국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 고려에 구원 요청을 했지만, 고려 현종은 이를 응해주지 않았습니다. 흥료국이 발해 부흥 운동의 명분만 내세웠지만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동북 9성의 위치

예종은 1107년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며 동북면 국경 지대에 아홉 개의 성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동북 9성의 위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함흥 평야보다는 위, 두만강보다는 아래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척준경의 마지막

척준경은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뒤 이자겸과 함께 이자겸의 난에 동참했지만, 나중에 이자겸을 제거했습니다. 척준경이 조공 관계를 받아들이자고 한 의도는 의아합니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제거한 뒤에도 탄핵을 받아들였고, 유배형을 받아들인 이유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인종과 서경 천도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서경파 귀족들을 등용하고 석영 천도를 준비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최종 결정을 미뤘습니다. 이로 인해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종은 개경파 귀족 김부식에게 진압군을 조직하게 했습니다. 인종이 왜 마음을 바꿨는지는 불명확합니다.

고려 중기의 화가 이령과 이광필

고려 중기에 유명한 두 화가 이령과 이광필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도화원 소속의 직업 화가였으며, 송나라 황제도 이들의 솜씨를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벽란도의 위상

고려 최대의 무역 항구 벽란도는 고려의 유일한 큰 항구로, 많은 외국 상인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벽란도의 개방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송나라와 이슬람 상인의 방문 횟수가 빈약하고, 민간 무역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방의 창설 시점

중방은 중앙군 2군 6위 중 최고 장교 16명의 회의를 맡던 기구로,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국사를 전담하는 최고 의결 기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설 시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만적의 주인

만적은 1198년 개경에서 노비 반란을 도모했으나 발각되어 진압되었습니다. 흔히 만적이 최충헌의 노비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는 그저 사노비로만 적혀 있습니다.

저고여 피살 사건의 범인

몽골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서 피살된 사건의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여진족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최우의 후계자 선정

최우는 후계자로 아들이 없어서 사위를 지목했으나, 사위가 딸과 싸워 죽였습니다. 최우에게는 천출 사생아 만종과 만전 형제가 있었으나, 동생 만전을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왜 형이 아닌 동생을 지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고려 청자의 탄생 배경

고려 청자는 10세기경부터 생산되기 시작하여, 11세기와 12세기에 순청자로 절정을 찍었습니다. 이후 상감 기술을 적용하여 상감 청자가 탄생했으며, 대몽 항쟁 시기에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전란 중에도 완벽한 예술 작품이 성행한 이유는 의문입니다.

삼별초의 항쟁과 배중손, 노영희의 후일담

삼별초의 항쟁을 이끈 배중손과 노영희의 최후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여몽 연합군이 진도를 진압할 때 두 사람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여몽 연합군은 규슈섬 하카타만 상륙에 성공했으나, 내륙으로 진격하지 않고 배에 머물다 태풍으로 인해 많은 병사가 익사했습니다. 왜 상륙 후 배에 머물렀는지 의문입니다.

충정왕의 죽음

고려의 마지막 왕인 충정왕은 강화도로 유배된 뒤 독살되었습니다. 그 범인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조일신의 난

조일신은 공민왕의 최측근이었으나, 기철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공민왕이 조일신을 왜 내쫓았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문익점이 목화씨를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만 전해집니다. 문익점이 유배 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노국 대장 공주 사후 공민왕의 정치개입 여부

노국 대장 공주 사후 공민왕이 모든 정사에서 손을 뗐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공민왕은 요동 정벌을 감행하는 등 정치에 완전히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왕의 아버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이 여종 반야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는 주장은 증거가 없습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의 진심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때부터 역성혁명을 품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정도전과 친해졌지만, 역성혁명이 성공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습니다.

최영의 무덤

최영의 무덤에는 한동안 풀이 나지 않아 '덕분'이라 불렸습니다. 죽기 전 최영은 무덤에 풀이 나지 않으면 자신의 청렴함을 증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몽주와 이방원의 시조

정몽주와 이방원이 시조를 주고받았다는 기록은 정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두 시조의 진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미스터리들은 후대의 연구와 해석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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