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이유, 땅의 절반을 떼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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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은 이유

태국은 단 한 번도 서구열강의 식민지를 겪지 않은 나라로 유명합니다. 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자부심도 당연히 대단합니다. 태국은 국명을 두고 시안과 타이를 오가다가 1949년 타이로 확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타이는 태국어로 '자유'를 뜻하며, 태국명소 타이 혹은 영어명 타일랜드는 모두 '자유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식민지로 고통받은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다르다는 국가적 자부심이 확연히 드러나지요. 하지만 이건 수많은 굴욕을 견딘 결과였습니다.

지금도 주변국들은 이점을 콕 찍어 태국을 경멸하기도 합니다. 식민지의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이 서사는 18세기 후반 중국 출신의 장군 탁신에서 시작됩니다. 탁신은 태국의 광개토 대왕으로, 그는 순식간에 미얀마와 베트남 일부를 제한 동남아 대륙국가 대부분을 지하고 불리 왕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오른팔이었던 차오프라야 차크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신을 죽이고 차크리 왕조를 세웁니다. 이게 지금의 태국 왕실입니다.

이유는 정신병 때문이라지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니 알 수는 없습니다. 태국의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오래지 않아 세계사를 뒤집을 어마어마한 변화가 갑자기 시작되었습니다. 무한 무기로 중무장한 백인들이 어디선가 나타난 것입니다. 특히 수백 년간 승패를 가리지 못했던 미얀마와 베트남이 영국과 프랑스에 손쉽게 꺾이는 걸 본 태국은 극심한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몽구입니다. 그는 왕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숙녀가 됩니다. 이게 태국에 행운이라면 행운이었습니다. 이 기간 몽구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서양의 선교사로부터 영어와 과학, 수학 등을 배우면서 제국주의의 무서움을 깨닫게 됩니다. 47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몽구는 유럽 열강과의 전쟁은 커녕, 무력 개입의 빌미를 아예 주지 않는다는 확고한 대외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를 대나무 외교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불러지지 않도록 대 실리를 챙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태국 외교의 기본입니다. 그 방침대로 몽구는 영국이 내민 보링 조약에 사인했습니다. 자유 무역관과 특별 관세, 치해 벽권 등 영국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는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프랑스, 미국, 독일과 연달아 유사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때마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몽구는 이것만이 태국이 살 길이라며 밀어붙였습니다. 몽구는 영어를 쓰며 직접 각국의 외교관들을 술 대접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끝났다면 몽구의 대나무 외교는 허울뿐 굴욕 외교에 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몽구는 한 발 더 나아가 조약을 맺은 강 나라의 인재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습니다.

80여명의 유럽 전문가들에게 군, 경찰, 세관, 항만 등을 맡겨 선진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거죠.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영리한 방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적으로는 근대화에 나서 절도를 건설하고 처음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태국은 영국처럼 자동차가 좌측 통행하는데, 이것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몽구 왕은 자녀들의 영어 교육을 위해 한 영국 여성을 가정 교사로 채용했는데, 이 경험담이 후에 영화 '왕과 나'가 되었습니다. 몽구가 시작한 태국의 대나무 외교는 아들 라마 5세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욕심이 경제의 개방으로 끝날 리 없습니다. 머지않아 이들은 영토까지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함대를 동원해 방콕의 왕궁으로 한포를 정주한 채 라오스를 달라고 노골적으로 윽박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할 때마다 미얀마와 캄보디아, 라오스와 베트남 땅을 뛰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광개토 대왕인 탁신이 읽어 놓은 땅을 모두 잃게 되었죠. 그게 태국 영토의 절반이나 되었으니, 독립의 대가로는 상당히 컸습니다.

태국은 유연한 외교정책의 승리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살점을 뛰어내본토를 치킨 셈입니다. 하긴 그러고도 우리의 다섯 배이니 태국 당이 크긴 합니다. 태국이 식민지를 모면한 건 지리적 행운도 있었습니다. 공교롭게 태국을 가운데에 두고 서쪽으로 영국이 인도와 미얀마를 가지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프랑스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지배했습니다.

국보다 한발 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프랑스는 특히 동남아를 집요하게 공략했습니다. 양대 식민 제국은 이제 그간 확보한 동남아의 모든 식민지를 걸고 태국에서 최종 승부를 가릴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건 양쪽 다 너무 큰 모험이었습니다. 둘이 싸우길 기다려 어부지리를 누리는 다른 식민 제국은 넘쳐났습니다.

태국이 땅만 크지 자신들이 잘 먹지 않는 쌀을 빼곤 딱히 욕심나는 자원도 없는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태국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니 먼저 쳐들어갈 명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을 버려 태국을 완충지대로 남겨두기로 합의했습니다. 이게 1896년 1월입니다. 태국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라마 4세와 라마 5세가 그 오랜 굴종을 인내한 끝에 태국의 독립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로 태국의 위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본이 들어왔습니다. 일본은 태국에 미얀마와 말레이시아에 있는 영국을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죠? 1592년 임진왜란 때 명을 칠테니 조선의 길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거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때도 태국은 일본의 요구를 순순히 틀어 주었습니다.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영국의 선전 포고를 한 다음, 태국의 모든 도로와 철도, 군사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본이 영국군 포로를 동원해 미얀마와 태국을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바로 이때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태국은 일본이 영국과의 전쟁에서 밀리자 태세를 전환해 도리어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덕에 태국은 졸지에 2차 대전 후 전범국이 아닌 승전국이 되어 여러 특혜를 누렸습니다. 태국의 배신에 치를 던 영국과 프랑스에게 잽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죠. 그리고 미국에게 한국 전쟁의 군을 파견하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피하고 근대화의 일찍 나선 덕에 동남아의 지역 강국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죠. 그래서 일각에선 태국의 바람 부는 대로 휘어지는 실용적인 외교를 칭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식민 제국에 맞섰던 주변국들의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습니다. 태국의 실상이 식민지와 다를 것도 없었고, 간에 붙었다 슬기에 붙었다 하니 박쥐에 불과하다는 거죠. 특히 오랜 앙숙 관계인 미얀마는 태국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조롱합니다. 이게 태국의 발작 버튼이라는 걸 잘 아는 거죠.

그럴 때마다 태국이 발끈하는 걸 보면, 식민지를 피하려 영토를 내어 준 걸 내심 무척 자존심 상해하는구나 싶습니다.